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막성 전투 (문단 편집) ==== 전투 결과 ==== >가을 8월, 백제가 아막성(阿莫城)에 쳐들어왔다. 임금이 장수와 졸병들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'''크게 쳐부수었으나,''' 귀산(貴山)과 추항(箒項)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. >---- >'''《삼국사기》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1642690&ref=y&cid=49625&categoryId=49798|제4권 <신라본기> 제4 진평왕]]''' ---- >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떨쳐나가 공격하니, '''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, 수레 한 대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.''' >---- >'''《[[삼국사기]]》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1642877&cid=49615&categoryId=49615&expCategoryId=49615|<귀산 열전>]]''' ---- >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(小將) 추항(箒項)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. 나머지 병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병사가 패배하였다. '''해수는 겨우 위기를 벗어나 단신으로 돌아왔다.''' >---- >'''《삼국사기》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1642802&cid=49615&categoryId=49615&expCategoryId=49615|제27권 <백제본기> 제5 무왕]]''' 신라군의 대승이었다. 40,000명에 달하는 백제의 대군이 궤멸당했으며, 총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사비성으로 돌아왔다. 이후 해수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는 없으나 왕이 분노하며 40,000명의 병력을 모아 보냈던 것임을 감안하면 [[대성팔족]]의 일족임에도 처벌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. 한편 [[진평왕]]은 신하들과 함께 아나(阿那)의 들로 나아가 이날의 승리를 치하했다. 하지만 용맹하게 싸운 귀산과 추항은 온 몸에 난 상처로 인해 신라로 돌아오던 중 숨졌고, 진평왕은 이들의 시신을 보며 통곡하며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었다. 이후 귀산에게는 [[나마]], 추항에게는 [[대사]]를 추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